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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 Veterans Meeting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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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전시실

#01 도약의 계기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 6개월에 걸친 국군의 베트남파병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 6개월에 걸친 국군의 베트남파병은 한국 정부가 기대했던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국방 및 안보분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시 제3공화국 정부는 국군의 파병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지면서, 미국의 원조를 얻어 굳건한 안보태세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 미국의 지우너과 전쟁특수를 활용한 외화수입으로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했던 한 . 미 안보동맹과 그 밖의 한 . 미관계가 상호협상의 관계로 변화되는 계기가 됐다.

다만 미국 . 한국 등 우방국이 지원했던 남베트남 정부가 그들의 철수 2년 후인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에 점령당함으로써 파병의 명분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사태는 한국 정부가 얻고자 했던 것을 대부분 얻은 후였기 때문에 파병의 의미와 성과 자체가 변질되거나 퇴색 된 것은 아니었다.

#02 베트남 파병 전·후 경제성장 추이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 6개월에 걸친 국군의 베트남파병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 6개월에 걸친 국군의 베트남파병은 한국 정부가 기대했던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국방 및 안보분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당시 제3공화국 정부는 국군의 파병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지면서, 미국의 원조를 얻어 굳건한 안보태세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 미국의 지우너과 전쟁특수를 활용한 외화수입으로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했던 한 . 미 안보동맹과 그 밖의 한 . 미관계가 상호협상의 관계로 변화되는 계기가 됐다.

다만 미국 . 한국 등 우방국이 지원했던 남베트남 정부가 그들의 철수 2년 후인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에 점령당함으로써 파병의 명분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사태는 한국 정부가 얻고자 했던 것을 대부분 얻은 후였기 때문에 파병의 의미와 성과 자체가 변질되거나 퇴색 된 것은 아니었다.

#03 정치 ·외교적 성과 Ⅰ

정치적 안정과 북한의 위협저지 1961년 5월, 군사정부가 출범할 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정치 .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피살 후 10번의 쿠테타와 정권교체가 반복되면서 결국 나라를 잃게 됐던 상황과 비슷했다.
따라서 1960년대의 우리나라는 먹고 사는 문제보다 남침이 휠씬 더 위협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베트남파병과 한 . 일 국교정상화를 국가전략으로 선택했으며 그중 파병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한 . 일 국교정상화는 국민들의 반대시위가 난무했지만 베트남파병은 파병기간 내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어 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의 높은 신뢰를 얻게 됐다.

그 결과 정부는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 위기설이 난무했던 시기를 슬기롭게 넘기면서 미국의 지원을 국가발전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반면 당시 정부가 국군의 파병을 정권연장에 이용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03 정치 ·외교적 성과 Ⅱ

국가 위상의 구축 1960년 초까지 우리나라의 안보는 물론 경제 및 사회 전반에서 미국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한·미 관계는 상호 대등한 주권국가의 관계가 아닌 미국 주도의 일방적 관계였다.

그 같은 여건에서 한국은 전투부대 파병협상에 임하면서 우리의 요구를 미국에게 분면하게 제시했다. 전부부대 파병이 시급했던 미국은 한국의 요구가 무리하게 여겨졌지만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제9사단 파병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지원 내용을 서면으로 약속한 브라운각서(서한)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한편 한국은 파병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강화해 아시아태평양지역각료회의(ASPAC)를 창설하고 주도했으며, 베트남참전국 정상회담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베트남파병은 국가발전은 물론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강화하고 국위선양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반면 한국의 파병은 비동맹 제3세계가 한국을 배척하는 이유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05 안보 · 국방분야 성과

자주국방의 계기마련 1960년대 북한은 소위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한 후 무력으로 적화 통일하겠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남한을 위협했다. 반면 베트남전쟁에 따라 미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의 전환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결행된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약속받고,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비현대화 등 전력증강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나아가 1972년 M16소총공장 건설을 시작으로, 각종 전차, 헬기 등을 양산할 수 있는 방위산업 체제로 자주국방의 기반을 조상했다. 파월장병들의 전투경험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베트남 파병을 통해 1960~1970년대 안보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자주국방의 터전을 마련했다. 반면 한국의 파병은 북한을 자극해 그들의 도발을 불러 왔다는 평가도 있다.

#06 베트남 파병의 경제적 성과

오늘날과 같은 국가발전의 원동력 국군의 베트남파병으로 국내에 유입된 거액의 외화는 경제 . 사회발전의 바탕이 되었으며, 궁극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파병과 관련된 외화 수입은 미국의 군사 원조와 전쟁특수, 그 밖의 간접효과 등을 포함하면 줄여 잡아도 50억 달러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1965년 장기간의 한일 협상으로 얻어낸 대일청구권자금이 차관을 포함해 총 8억 달러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1963년 우리나라의 수출 총액이 1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때 당시 50억 달러의 가치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효과는 외화의 유입으로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으며, 또한 정부 및 기업의 베트남 진출경험을 활용해 그 후 중동진출 기틀을 마련했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때, 베트남파병이 직 . 간접적으로 국가전반에 미친 영향과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07 미국의 경제지원

군사원조 제9사단 차병협상 과정에서 브라운각서(서한)는 한국군 파병을 전제로 미국 정부가 지원할 내용을 서면으로 약속한 문서다. 그 외에도 미국은 한국군의 파병을 요구할 때마다 군사원조, 경제개발 지언 등을 약속했다.

미국의 직 . 간접적인 지원내용을 분야별로 요약하면

첫째, 한국군의 파병에 따라 증액된 군사원조로 10억 달러 내외
둘째, 파병으로 군원이관 중지에 따라 1억 달러 내외
셋째, 파병된 한국군과 관련해 지출된 경비로 10억 달러 내외
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미국의 지원은 10억 달러의 차관과 기술제공, 한국 상품 구매확대 등 전반에 걸쳐 이루어 졌다.
당시 정부가 의욕적으로 계획했던 경제개발 5개년계획 역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업의 베트남 진출 또한 미국의 지원과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08 경제·사회적 성과 (베트남전쟁 특수)

국내기업의 해외진출 경쟁력 배양 한국군이 파병 전까지 한국과 베트남 간의 정기적인 경제교류는 없었다. 부분적으로 안남미(安南米)라고 하는 베트남 쌀을 수입하여 굶주림을 면했던 정도였다.

그 후 베트남전쟁으로 미국의 대규모 군사 및 경제원조가 이루어지면서 남베트남의 구매력은 급격히 상승했다.
그 같은 여건에서 참전국의 특혜에 따라 한국의 상품수출과 민간기업의 진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됐다.
그 결과 한국은 파병기간 중 시멘트, 나이론 등의 원료제품과 자동차부품 등 기계류, 담배, 맥주 등 소비재 무역부분에서 3억 달러, 건설·군납·용역, 그리고 기술자 및 근로자의 송금 등비무역 부문에서 7억 달러 등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베트남에서 벌어들였다.

더 큰 혜택은 기술력이 일천했던 한국 상품들이 참전국의 특혜로 보호받으면서 경쟁력을 갖추어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추월할 수 있었으며 일본·타이완 등과 경쟁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09 경제·사회적 성과 (민간기업 및 기술자의 진출)

최초의 대량 해외취업 사례 한국의 베트남특수는 참전용사 송금, 기술자 및 근로자 해외취업 등 비무역 부문에 힘입은바 컸다.
그중 해외취업은 제3국인을 고용할 때 ‘참전국-원조국-우방국’ 순으로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미 · 베트남 간의 참전국 우대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군파병 기간 중 한국인 베트남에 진출한 기술자 및 근로자는 총 88개 기업, 25,281명으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베트남에 진출한 국내기업에 취업한 사례로
- 한진상사 : 3,475명 / 통훈경남 : 1,790명 / 공영건설 : 666명 / 현대건설 : 499명
- 기타 55개 기업 : 3,129명 등으로 총 59개사 9,559명 이었다.

둘째, 남베트남에 진출한 외국기업에 취업한 사례는
- PHLL CO : 4,519명 / RPM-BRJ : 3,581명 / VINNELL : 3,490명 / PA&E : 2,327명
- 기타 25개 기업 : 1,805명 등 총 29개사 15,772명이었다.

#10 주월 한국군 태권도 교관단의 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