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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 Veterans Meeting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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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실

#01 오음리

오음리(梧陰里) 1965년 10월에 파병된 해병여단과 수도사단은 포항과 홍천에서 파병 준비와 훈련을 마치고 베트남으로 향했다.
그후 1966년 4월, 수도사단 제26연대가 추가로 파병되고 교대 병력을 1년 단위로 파병하면서부터 화천군 오음리가 베트남파병 기지로 자리 잡게 됐다.

당시 오음리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곳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관으로 제26연대 파병 환송행사를 거행하면서 부터였다.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산골마을은 새롭게 탈바꿈했다.
경비행기 활주로가 건설되고 도로가 포장되면서 주변지역까지 말끔히 정비됐다.
뒤이어 훈련이 시작되면서 상점, 여관 등 면회객을 위한 시설이 앞 다투어 생겨났다.

그때부터 오음리는 8년여 동안 베트남에 파병됐던 한국군 32만여명의 목숨을 건 대장정의 출정기지였다.
그리고 역사상 최장기간, 최대 규모의 해외파병 발진기지가 됐다.
그 옛날 춘천역에 내린 용사들은 털털거리는 트럭에 올라 뽀얀 먼지를 날리며 아흔 아홉 굽이 배후령을 넘어 나지막이 누워있는 깊은 산간마을 오음리로 향했다.
오음리(梧陰里)라는 지명은 오동나무와의 인연으로 붙여진 것이라는데 정작 오동나무는 구경할 수가 없다.
다만, 고개 정상에 있는 38선 표석으로 오음리는 한국전쟁 이후 수복 된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초겨울이면 고갯길 아래 오음리의 검은 골짜기에서 하얗게 피어오른 안개가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낸다.
이제는 버려진 콘크리트 건물만이 덩그러니 남아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게 한다.

#02 아직도 그때의 함성이 ...

해외파병 발진기지/역사의 현장 오음리의 훈련은 실전과 다름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때 그 시절 참전용사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던 함성의 기억들이 오음리 훈련장 곳곳에 남아있다.

산악 능선이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싸인 오음리 일대에서 참전용사들은 한 여름의 땡볕에서, 한 겨울 눈보라의 악조건을 견디어가며 적을 능가하는 체력을 단련하고 전투기술을 연마해야 했다.

오음리는 베트남 참전용사들이 넘어야 할 1차 관문 이었던 셈이다.
그 관문을 통과하면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점차 필승의 신념으로 바뀌어 졌다.

이제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은 40년 안팎의 세월이 지나 역사가 됐다.
따라서 오음리는 참전용사들에게 아련한 ‘추억의 장소’로 그들의 마음에 간직되고 후세들은 조국의 발전을 가져다 준 ‘해외파병 발진기지’라는 ‘역사의 현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03 참전용사의 목숨을 지켜준 훈련장 ...

오음리 훈련장 40여 년 전의 오음리의 훈련장은 악명높은 곳이었다.팔꿈치와 무릎의 피부가 벗겨지는 각개전투 훈련장과 온몸을 휘감는 공포에 떨어야 했던 체험훈련장.

밤낮이 따로 없었던 수색정찰 및 매복훈련장과외줄·두줄·세줄타기에 이어진 레펠, 도피 및 탈출의유격훈련장 막히는 사격과 기동의 연속이었던 분대·소대·중대전투훈련장 등 각각의 훈련장마다 참전용사들의 피땀과 애환이서려있다.

그러나 오음리의 강도 높은 훈련이 있었기에 파병된 참전용사들은 결코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