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ietnam Veterans Meeting Place

전시관 둘러보기

제1전시실

#01 참전 배경

한국군의 참전 195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부가 등장했지만 나라의 사정은 참담했다. 북한의 남침위협으로 일촉즉발의 위기설이 꼬리를 이었고, 6·25전쟁이 남긴 상처로 사회불안요소가 산적해 있었으며, 보릿고개로 표현되던 경제적 어려움으로 서민들은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다.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았다. 부족자원도, 기술도, 생산시설도 없었고 경작지도 턱없이 모자랐다.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의 원조였다. 미국의 도움이 있어야 북한의 남침저지와 경제부흥이 가능했다. 그 같은 상황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지원과 원조가 절실했던 한국 정부가 안보(安保)와 경제(經濟)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 위해 선택한 국가 전략이었다.
따라서 한국군의 파병은 미국이 강요한 것이 아니고 한국의 제안을 미국이 받아들인 것이며, 베트남 전쟁의 국제화를 위해 우방의 참여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미국의 이해와 일치한 결과였다.

#02 비전투부대파병

의료지원단/건설지원단 파병 베트남 사태에 대해 후원국 입장을 취해왔던 미국은 1964년 3월, 우방국과 공동으로 베트남 사태에 대처한다는 More Flags 정책을 채택했다.
따라서 미국은 1964년 5월, 25개 우방국에게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했으며, 한국의 파병제안을 거절했던 종전의 방침을 바꿔 의료지원단 파병을 요청했다.
미국의 요청 이전부터 파병을 준비하고 있던 한국 정부는 그 해 9월, 130명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했다. 그 후 1964년 8월,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면서 한국의 건설지원부대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은 두 번째의 파병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1965년 3월,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2천명 규모의 건설지원단을 베트남에 보냈다.
이상과 같은 두 차례의 비전투부대 파병은 인도적 차원이었다. 한국정부도 파병 경비 외에 아무런 대가없이 그들을 보냈다.

#03 전투부대파병Ⅰ

해병여단(청룡)/수도사단(맹호) 파병 한국군 건설지원단이 파병되던 1965년 3월부터 베트남전쟁은 더욱 격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전투 부대 3개 사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그 중 1개 사단을 한국이 파병해주도록 요청했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파병을 요청하자 한국은 비전투부대 파병 때와는 달리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① 파병 병력의 상한은 5만명 이내
② 한국군 현대화 지원
③ 북한 침공시 미국의 즉각 출병보장
④ 파병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미국이 부담
⑤ 한국의 남베트남 시장(柴場) 진출 보장 등

한국군의 파병이 절실했던 존슨 대통령은 그 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초청해 최고의 우를 다했다. 그리고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그 같은 양국의 협상결과에 따라 한국은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그 해 10월, 제 2해병여단(청룡부대)과 수도사단(맹호부대)을 파병했다.

#04 전투부대파병Ⅱ

제9사단(백마부대) 파병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로 남베트남을 대신해 전쟁을 떠안은 미국은 1965년 말까지 미군 18만여 명과 한국 등 우방국의 병력 등을 합해 20만여 명을 베트남에 보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미국이 선택한 대안은 한국군 추가파병이었다.
청룡·맹호부대의 눈부신 활약도 한국군을 선호하게 된 배경이었다. 한국 정부도 추가파병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미국의 지원을 더욱 확실하게 얻어내려 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의 선면 약속을 요구했다. 그 결과 외교적 관례를 뛰어넘는 파격적 조치로 브라운각서(서한)가 만들어졌고, 브라운각서는 한국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의 결정적 바탕이 됐다. 두 나라의 협상에 따라 1966년 9월, 제9사단(백마부대)이 파병되었다. 100군수지원사령부, 해군수송전대, 공군지원단 등의 부대를 증·창설하여 베트남에서 전략적 임무를 수행하는 파병국으로 격상됐다.
브라운각서(서한) 주요내용 (Major contents df the Brown Memorandum)
군사원조(Military Assistance)
1. 앞으로 수년 내에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상당량의 장비를 제공한다.
2. 베트남 파병에 소요되는 장비와 경비를 모두 부담한다.
3. 추가 파병되는 병력 대체에 필요한 장비, 훈련경비, 재정을 부담한다.
4. 대간첩작전 능력 개선을 위한 공동연구 결과에 따라 필요한 지원을 제공한다.
5. 한국의 탄약증산을 위해 병기창 확장을 지원한다.
6. 서울과 베트남 주둔부대의 원활한 통신을 위해 전용 통신시설을 제공한다.
7. 베트남 주둔 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C-54 수송기 4대를 제공한다.
8. 한국군 시설 개선에 필요한 비용을 제공한다.
9. 한국군에게 합의 된 해외 근무수당 지급을 위한 경비를 지원한다.
10. 베트남 전·사상자의 보상금을 두 배로 인상한다.
경제원조(Economic Assistance)
1. 1개 예비사단, 1개 예비여단 및 지원부대의 동원 . 유지에 필요한 예산을 지급한다.
2. 한국군 2개 사단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있는 동안 군원이관을 중지한다.
3. 파병된 한국군에 소요되는 물자를 한국에서 구매하며,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물자를 가급적 한국에서 구매한다. 한국 기업의 남베트남 진출 기회와 용역사업 참가 기회를 제공한다.
4. 수출 진흥을 위한 전 분야에서 기술협조를 강화한다.
5. 약속한 AID 차관과 아울러 한국의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을 추가 제공한다.
6. 한국의 남베트남 수출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제공한다.

#05 전투부대 추가파병 검토

북한의 도발 베트남전쟁의 미국화로 남베트남을 대신해 전쟁을 떠안은 미국은 1965년 말까지 미군 18만여 명과 한국 등 우방국의 병력 등을 합해 20만여 명을 베트남에 보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미국이 선택한 대안은 한국군 추가파병이었다.
청룡·맹호부대의 눈부신 활약도 한국군을 선호하게 된 배경이었다. 한국 정부도 추가파병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미국의 지원을 더욱 확실하게 얻어내려 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의 선면 약속을 요구했다. 그 결과 외교적 관례를 뛰어넘는 파격적 조치로 브라운각서(서한)가 만들어졌고, 브라운각서는 한국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의 결정적 바탕이 됐다. 두 나라의 협상에 따라 1966년 9월, 제9사단(백마부대)이 파병되었다. 100군수지원사령부, 해군수송전대, 공군지원단 등의 부대를 증·창설하여 베트남에서 전략적 임무를 수행하는 파병국으로 격상됐다.

#06 베트남평화협정과 철군

한국군 제1·2단계 철군 1968년 1월, 베트콩의 뗏공세 이후 미국은 평화협상 제안에 이어 미군의 단계적 감축을 시작했다.
나머지 참전국들도 미군과 보조를 맞추어 주력의 철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주월 한국군의 철수는 주한 미군 철수와 관련되어 있어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한국정부는 파병의 조건으로 매번 주한 미군의 현상유지를 요구했고, 미국은 한국정부와 긴밀히 협조하겠다는 내용을 그 때마다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자 미국은 1970년 7월, 주한 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을 철수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한국 정부는 미군 철수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주한 미군 철수에 따라 한국 정부도 1단계로 1971년 12월부터 해병여단 등 1만여명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맹호·백마 등 주력의 잔류로 1972년말부터 한국은 미국을 능가하는 최대 파병국이 됐다. 그 후 한국군 주력은 베트남 평화협정과 함께 2단계 철수를 시작해 1973년 3월, 모든 병력을 철수하여 8년 6개월의 파병을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