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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 Veterans Meeting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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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실

#01 이인호 소령과 해풍작전

베트남에서 전투수행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된 최초의 주인공 베트남에서 전투수행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된 최초의 주인공은 故 이인호 소령이다. 그는 뚜이호아에 주둔하던 해병여단이 1966년 7월 25일부터 8월 25일까지 수행한 해풍작전 당시 제3대대 정보장교였다.

작전 마지막 날인 8월 11일, 이대위는 전날 체포한 베트콩을 신문해 그들의 은거지를 확인하고 현장에 출동해 동굴 탐색작전을 지휘했다.
최초의 탐색이 예상에 미치지 못하자 자신이 직접 나섰다. 그가 동굴 구조를 파악한 후 5m 정도를 나아갔을 때 갑자기 수류탄이 날아왔다.
이대위는 “수류탄이다! 엎드려!” 라고 외치며 날아온 수류탄을 집어 전방으로 던졌다. 그 사이에 또 다시 수류탄이 날아오자 그가 몸으로 덮어 장렬히 산화했다.

정부는 이대위가 실천한 살신성인의 뜻을 기리며 1계급 특진화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해군교육사령부와 해군사관학교는 그의 동상을 건립해 그의 희생정신을 본받게 하고 있다.

#02 지덕칠 중사와 강구전투

많은 참전용사들은 베트남정글의 대표적 영웅 많은 참전용사들은 베트남정글의 대표적 영웅으로 故 지덕칠 중사를 지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제2해병여단 2중대 3소대 위생관리관인 지하사가 베트남 중부 해안 빈쩌우 반도의 강구전투에 투입된 것은 1967년 1월 31일이었다.

그날 아침, 지하사 소대가 헬기로 목표에 착륙하자마자 적의 집중사격이 쏟아졌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지하사도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총탄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전우를 구했다. 상급부대 증원이 실패하자 소대장은 지하사를 1분대장으로 임명해 탈출을 지휘하게 했다. 겨우 포위망에서 벗어난 소대는 구호헬기를 요청해 부상자를 후송했다.
온 몸에 총탄을 8발이나 맞은 지하사의 양보로 다른 전우 6명이 먼저 후송됐다. 그러나 두 번째 헬기 도착이 늦어져 지하사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부는 그의 살신성인 정신을 기리며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해군은 진해 작전사령부에 동상을 세워 그의 용맹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03 송서규 대령과 닌호아2호 작전

자신의 목숨보다 임무를 완수하고자했던 지휘관의 살신성인 정신 1967년 11월 6일, 새벽 베트콩 1개 대대가 제9사단 지역 닌호아 시가지를 점령했다. 제29연대는 제2, 3대대로 닌호아2호 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제2대대장이던 송중령은 임기가 끝나 후임 대대장과 함께 출동했다.

제2대대가 적을 포위한 후 좁혀 들어갔지만 완강한 저항으로 진척되지 못했다. 헬기로 공중에서 지휘하던 송중령은 밤이 되면 적이 도주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진출이 늦은 제6중대 지역에 착륙해 중대를 손수지휘하며 독려했다. 그때 제3소대장이 전사하자 그는소대를 직접 지휘하며 병사들과 함께 50여Km를 전진했다.
그러나 30m 전방에서 날아온 적의 집중사격으로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대대장이면서 전투원으로 나선 그의 행동에 대해 엇갈린 평가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보다 임무를 완수하고자했던 지휘관의 살신성인 정신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정부는 송중령에게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을 추서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04 최범섭 중령과 베트콩의 뗏공세

동포사랑과 책임감을 높이 평가해 태극무공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 한국군이 파병되면서 남베트남에서 태권도는 요즈음 한류열풍과 같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됐다. 그러자 한국군은 태권도 교관을 200여 명으로 늘려 남베트남 군단 단위에 태권도지구대를 설치했다.

최범섭 소령은 메콩강 남쪽 껀토의 제4군단에 파견 된 지구대장이었다. 당시 껀토에는 한국 민간기술자 40여 명이 있어 최소령은 그들의 후견인 역할까지 했다.
그러던 1968년 1월 31일 음력 설날, 베트콩은 명절을 이용해 뗏(Tet) 공세를 감행했다. 베트콩의 무차별 공세가 시작되자 최소령은 무방비 상태의 동포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날 시내로 나가 20여명의 기술자들을 데려다 군단사령부에 대피 시켰다.
전투가 계속되자 그는 2월 6일, 나머지 20명의 동포를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베트콩과 교전 끝에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그의 동포사랑과 책임감을 높이 평가해 태극무공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해 그의 높은 뜻을 기렸다.

#05 임동춘 대위와 안케전투

육군보병학교는 그의 동상을 세워 후배들의 귀감 1972년 4월 11일 새벽, 638고지에 침투한 북베트남 정규군이 안케고개를 차단했다. 안케고개는 베트남 중부 해안과 내륙을 연결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고개가 차단되자 수도사단 기갑연대는 다음날부터 중대단위 부대를 계속 투입했지만 매번 많은 피해를 입고 실패했다. 그때 故 임동춘 대위가 속한 제2중대가 투입되어 임중위의 산도로 적의 1선 벙커를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임중위는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로 적 벙커 5개를 폭파해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는 적의 집중포화를 피하지 못한채 호국의 별로 산화하고 말았다.

임중위의 전사로 2중대 공격도 실패했지만 그의 용전분투는 638고지 점령의 바탕이 됐다. 정부는 그의 정신을 높이 평가해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고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육군보병학교는 그의 동상을 세워 후배들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06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태극무궁훈장을 받은 영웅 15명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태극무궁훈장을 받은 영웅 15명이 탄생했다. 그 중 3명은 주 베트남 미군사령관 등 외국군에게 수여 됐으며, 12명의 한국군 중 전사한 6명은 사후(死後)에 추서(追敍)됐다.

을지무공훈장을 받은 한국군 영웅은 16명이며, 충무무공훈장은 891명, 화랑무공훈장은 7,639명이며, 인헌무공훈장은 13,137명이다. 그 외에 미국과 남베트남 등 외국의 훈장을 받은 영웅도 많다.

다른 나라의 군인들과 달리 한국군의 파병은 개인이 지원한 것이라 하더라도 국민개병(皆兵)의 병역제도에 따라 국가의 명령으로 파병된 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이 국위선양을 위한 애국을 몸으로 실천한 것이다.따라서 특별한 잘못이 없는 한 참전용사 모두를 영웅이라해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