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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tnam Veterans Meeting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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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실

#01 식민지전쟁

1차 베트남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聯合國)의 승리로 끝나자 1858년부터 베트남을 지배해 왔던 프랑스는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베트남을 다시 지배하려했다. 이미 독립을 선포한 후 행정기관을 장악하고 있던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은 강력히 반발했다. 결국 양측은 1946년 12월 19일부터 전쟁에 돌입했다.
제1차 베트남 전쟁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군사력이 월등한 프랑스 군은 불과 며칠사이에 하노이 등 주요도시를 장악했다. 저항군 지도자 호찌민은 중국 국경 부근 산악으로 도주했다.
프랑스는 자신들의 일방적인 승리를 기대했지만 그것은 희망일 뿐이었다. 호찌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며 연전연승했던 프랑스군은 때와 장소를 가지 않는 베트남 게릴라들의 공격에 지치기 시작했다.

#02 미국의 개입

2차 베트남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국제정세는 미국중심의 자유세계와 소련중심의 공산진영으로 갈리며 양극체제로 대립했다. 이어서 미·소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냉전(Cold War)체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 후 1949년 10월 중국의 공산화에 이어 이듬해 6월 한반도에서 김일성의 남침이 시작되자, 미국은 공산주의 팽창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 자본주의 체제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미국은 즉각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아울러 베트남에서 고전하고 있는 프랑스를 돕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호찌민 세력에게 패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미국의 응오딘지엠 지원!! 프랑스의 철수로 동남아시아까지 미국의 세력권에 편입됐다.

미국은 남베트남에서 주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바오다이를 대신해 대통령으로 선출 된 응오딘지엠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공동전선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03 미국의 참전

통킹만 사건과 미국의 참전 ‘베트남전쟁의 미국화’ 정책 1955년 10월,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은 주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베트남공화국을 수립한 후 자신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지엠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남베트남 정국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엠 가족들이 정권의 전면에 나서면서 족벌독재와 부정부패가 자행되자 그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베트콩이 힘을 얻게 되었고, 북베트남의 지원이 시작됐다.
그 사이에 남베트남의 쿠테타로 지엠이 살해되자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공식적인 참전을 자제해오던 미국은 1946년 8월, 북베트남군이 통킹만 공해상에서 미군 함정을 공격했다고 발표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 남북 베트남의 내전이었던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참전으로 자유진영과 중국 .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진영의 대결로 바뀌었다.

#04 베트남 평화협상

북베트남의 기습공세 압도적인 군사력을 투입해 단기간에 남베트남을 평정한다는 미국의 전략은 1968년 1월, 뗏(Tet)공세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뗏 공세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설날(뗏)의 명절분위기를 이용해 사이공 등 주요 도시에서감행한 기습공세를 말한다.
그 때의 공세에서 공산군은 연합군의 반격으로 많은 병력과 물자를 잃었다. 따라서 전과와 피해로 본다면 그들의 완패였다. 그러나 Tv와 신문 등 언론이 전쟁의 참상을 앞 다투어 보도하면서 동양의 약소국을 상해하는 전쟁에서 미국이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계에 알려졌다.
그 때부터 전쟁의 의미와 성격에 의문을 제기하는 미국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반전(反戰)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기필코 승리하겠다던 미국 정부도 국민의 거센 반대를 무시할 수 없었다.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정책!! 결국 최강대국 미국도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1973년 1월, 상대방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철수했다.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즉 그들의 전쟁은 그들이 해결하도록 한 것이었다.

#05 남베트남 패망

3차 베트남 전쟁 1973년 1월 28일 베트남평화협정이 발효되면서 미군 등 연합국 군대가 철수하자 남베트남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나라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베트콩의 주장에 동조하며 외세 척결을 외쳤던 대부분의 남베트남 국민들은 스스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없었다. 당시 남베트남은 상대방과 결코 비교될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그러나 1975년 1월, 북베트남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남베트남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그 해 4월30일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고 허수아비 같은 베트콩의 정권은 1976년 7월 2일 북베트남이 주도하는 베트남사회주의 공화국에 흡수되고 말았다.
남베트남의 패망!! 전쟁의 대가는 엄청났다.
전 국토가 폐허로 변하고 200만명이상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수많은 남베트남 관리들이 재교육장에 수감되고, 주민들은 보트피플로 전락했다.
남베트남을 무너뜨리는데 앞장섰던 상당수의 베트콩도 살길을 찾아 보트피플에 합류 하였다.